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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능인선원11-24 15:22]

영원의 문을 항상 열어 놓으세요

개인적 사회적 영적진보-세가지 진보

다겁생의 인연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이렇게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러 가르침을 익혀가며 법우님들과 감로의 부처님 말씀을 정성스레 나눕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로 인생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분들을 만나 뵙게 됩니다. 그때마다 힘겨운 인생길 짧은 지견이나마 손을 맞잡고 고통의 해소책을 얘기하며 살아갑니다.

언제건 먼저 드리는 말씀은 “보살님! 저도 사는게 무척 여려워요. 세상 모두가 다 힘겹지요. 이들 어려움과 고통을 문제삼아 영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게 인생의 행로지요.”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님 뱃속에서 나와 부모님의 크나큰 은공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커나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선생님들께 배웁니다. 그리고는 직장을 얻고 아내와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룹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꼭 같은 길을 걷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낳아주셨지만 나에게 영원을 가르치기에는 힘에 버겁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역시 우리들에게 참다운 진리와 도덕률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흔히들 인간은 세가지 측면에서 진보를 도모하는 존재라 합니다. 하나는 개인적 진보 다음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진보 나머지는 영성적 진보라 합니다. 개인의 인격적 진보는 스스로의 인격함양을 위한 노력이라 볼 수 있고 사회적 진보는 개인적 진보를 바탕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진보라 할 것입니다. 영성적 진보란 우리의 이른바 마음을 바탕으로 영원을 가는 존재로서의 영적진보라 얘기합니다.

 

영원을 얘기하는 종교의 위력

개인적 사회적 진보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의 도움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영적진보에 대해 참다운 안내자라 불리우는데 선뜻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서양의 어느 곳에서나 그 결과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한 형태를 갖춘 종교라는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저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나의 영원한 존재가치를 얘기하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사명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를 넘어 영혼의 부모 어버이라는 점을 강력히 부각시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의무 못지 않게 영혼으로서의 의무에 대해 거센 어조로 얘기합니다. 그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도 입에 자주 올리지 않는 단어인 죽음이라는 단어를 상투적으로 얘기합니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길 꺼려 하는 단어인데 반해 그들에게는 그 단어가 마치 브랜드나 되는 듯 웃음 속에서조차 되뇌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당황하면서도 그들에 다가설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집행이 유예된 사형수이고 그들은 죽음 다음의 세계 천당 극락에 대해 강한 어조로 강조합니다. 특히 불교는 그들의 업(Karma)에 따라 내생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의 육도(六道)로 갈라진다 얘기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상황에서의 갖가지 고통은 과거생 전생에 지은 업(業) 때문이라 가르칩니다.

 

부처님 법의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돼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치지 않는 저들의 가르침을 과연 따라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사실에 있어 많고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아직 힘에 넘치는 젊음이라는 재산이 있어서 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회색빛의 안개처럼 뿌옇게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생노병사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의 수레바퀴를 거역할 자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당연히 공포이고 점차 노화되어 가면서 몸도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도 학교스승님도 가르치지 못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보면 종교에 대한 필요성은 거의 인간 누구에게나 필연이고 종교인구가 아무리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까지 불식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타종교는 이 같은 인간의 취약성을 파고들어 그들을 천당으로 인도합니다. 타종교는 아무리 어려운 세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 발버둥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어떤가요? 왜 부처님께서는 불법승 삼보라 하셨는가요? 진정 불교는 이 같은 중생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답해야 합니다. 머리깎고 사는 수행자들이 이 같은 중생의 고통에 동참해 부모님과 학교선생님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에 매진해야 합니다.

영원의 세계로의 안내를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모든 고통의 근본은 생노병사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중생의 고통은 출발합니다. 삼보의 역할이 얼마나 의미롭고 중요한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부처님 법에 대한 공부와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야 합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허망한 것들이란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생들의 세상은 더욱더 깊고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 일에 열심히 매진하는 가운데일지라도 결코 영원의 문은 열려 있어야 합니다.

기사제공 : 능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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